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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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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낫질 계획"의 수립 === [[파일:Fall Gelb first plan.png]] 1939년 10월, 최초 작성된 프랑스 침공 계획, 이른바 "황색 상황(Fall Gelb)[* Fall이란 말은 영어로 Case라는 뜻. 따라서 원래는 황색 상황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직역이지만 대개 황색 작전, [[청색 작전]]([[스탈린그라드 전투]]), [[백색 작전]]([[폴란드 침공]]), [[녹색 작전]](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 영어권에서는 Case와 Operation을 구분해서 쓰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잘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작전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기는 해프닝. 독일에서는 Fall과 Unternehmen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Fall이 좀 더 큰 단위로 쓰인다.]"의 초안은 [[슐리펜 계획]]과 기본적으로 같은 구성으로, 바다에 인접한 우익을 주공을 삼아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선회, [[벨기에]] 및 북프랑스에서 방어에 나설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독일의 슐리펜 계획과 프랑스의 17계획 [[파일:Schlieffen_Plan.svg.png]]}}} 그러나 문제는 프랑스군이 한 번 당한 걸 또 당할 리가 없다는 것 이었다. 아울러 당시 슐리펜 계획의 기본 전제는 프랑스군이 현재의 [[마지노 선]] 방면에서 독일 본토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는 전제 하에 발생하는 [[회전문]] 효과를 이용해서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는데, 애초에 침략전을 서유럽 내에서 펼치는 국가는 독일뿐이었고 이미 1차 대전에서 수백만 병사를 잃어 본 1940년의 프랑스군이 견고하게 구축한 마지노선을 냅두고 그때처럼 적극적으로 공격할 동기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한마디로 회전문 효과는커녕 오히려 ‘어서옵쇼’하고 있는 강력한 적 주력 부대와 정면충돌하게 된다. 이에 당시까지 군재는 영 아니라고 독일군 내부에서 비웃음을 사고 있던 히틀러조차 "이래서야 이길 리가 없잖아! 다른 데에서 주공을 더 늘리지 않으면 안 돼!"라고 대번에 계획안을 반려시킬 정도였다. 1939년 11월, 원래의 주공 남쪽에 새로운 주공을 두는 안이 제출되었으나, 이는 단지 전력 분산일 뿐 기존안과는 별다를 게 없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더 남쪽으로 세 번째 주공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시[* 즉, 중립국인 스위스를 경유해 리옹 방면으로 찔러 들어자는 제안으로 사실 병력이 충분했더라면 이 생각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수비는 기본적으로 동쪽에 치우쳐 있었고, 벨기에와 함께 수비를 하는 입장이라 나눠진 부대의 타격이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제법 위협적인 수가 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셋으로 쪼개져 축차투입되는 대참사가 벌어질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세 번째 주공을 만들었을 때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결국 병력의 집중이 없어져서 '주'공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따라서 돌파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기존 작전보다는 승산이 더 있다는 이유로 하마터면 진짜로 채택될 뻔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ordercolor=#536349,#333333><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Fall Gelb.png|width=100%]] || ||<rowbgcolor=#536349,#222222><rowcolor=white> ▲ 1940년 5월 당시 만슈타인 계획(Manstein Plan)에 의한 독일군의 초기 공세와 연합군의 딜 기동. || 그런데 바로 이 세 번째 주공으로 거론되던 기존의 조공부대인 A집단군에는 바로 그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이 있었다. 만슈타인은 세 번째 주공에 대한 논의가 치열할 때, 그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현장에 도착했던 1939년 10월 이후 가능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한 가지 계획'''을 입안한다. 이는 [[임무형지휘]]에 근거, 일선 지휘관 및 참모부가 그 상급 사령부, 그를 넘어 최고 사령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전 행동을 입안,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군이었기에 가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름이 붙지 않았던 이 계획은 다음의 4단계 발상을 거쳐 기획되었다. * 1) 현재의 작전 계획은 너무 뻔하므로 적도 당연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쉽게 실행 가능하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운다면 -그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정면으로 부딪혀 마지노선을 뚫고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격전|차마 생각도 못할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 사실 마지노 선의 건설이 바로 만슈타인이 우려한 것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에서 바보 취급받는 마지노선이지만 만슈타인을 비롯한 독일군에게 마지노선은 건설 의도대로 독일군이 해당방면으로 공세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 2) 따라서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실은 조공을 두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주공을 둔다.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원래 계획의 주공인 [[벨기에]] 북부 방면이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일대, 즉 '''아르덴 고원''' 일대이다.[* 앞선 1차 대전 국경 전투 당시 아르덴 고원은 독일제국군의 조공이었다.] * 3) 이렇게 병력을 운용할 경우, 적절한 기만의 결과로 적이 아군의 조공을 주공으로 착각하여 벨기에로 기동하게 할 수 있다면 아르덴으로 기동한 진짜 주공은 적의 주력이 벨기에로 진입하는 틈을 타서 [[회전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텅 빈 진공으로 빨려들어가듯 프랑스군의 배후로 진입, 벨기에로 들어간 프랑스군을 완전 포위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 4) 단 이 경우 시작부터 적의 주력과 교전할 벨기에 방면의 조공에 비해서 적의 후방으로 기동해야 하는 주공 부대는 그 기동 거리가 과격하게 늘어나고, 또한 현대전은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달리 피아 신속한 부대 전개 및 역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높은 기동력과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적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돌파 가능한, '''연속적인 전투 기획 및 실행이 가능한'''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기갑부대]]'''가 주공이 되어야 한다[* 이는 또한 기갑부대가(적어도 구데리안이 생각하기로는) 과도하게 신장된 측면에 대한 보호가 여타 부대 대비 덜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격중인 부대의 측면은 언제나 약점으로서 작용하며 해당 부분에 반격을 당한 공세측은 필연적으로 '공격 중 방어'를 수행해야 한다. 이때의 공격 측은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방자의 이점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방어 상황에 놓인다. 이것에 대한 위협을 무시할 시 공세는 그대로 절단되며, 이에 대한 우려로 병력을 나누어 잔가지를 뻗기 시작하면 결국 공세 자체의 충격력이 줄어들고야 만다. 최고사령부는 계획 단계 부터, 그리고 기갑군의 돌파 내내 이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실제로 구데리안의 회고록을 보면 최고사령부가 기갑군을 정지시키려는 사유의 태반은 보병부대로 하여금 신장된 측면에 대한 방어를 수행케하기 위해서였다.].이들은 신속하게 아르덴을 돌파, 북프랑스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진격해서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 프랑스와 벨기에 및 영국 유럽 원정군 주력을 '''단기간에''' 포위-섬멸해야 한다. 시간이 너무 걸리면 적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고, 역습에 대응할 만한 예비 전력을 확보해서 이를 기동시키기엔 현재 독일군의 역량 부족이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이다.[* 이와 같이 종심이 깊고 크게 호를 그리는 우회 기동의 형태가 낫 같고, 덤으로 낫으로 단숨에 모든 풀을 베어 버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렸다는 점 때문에 이 작전 계획을 낫질에 비유한 것이 유명해졌다. 그런데 앞에서 멋지게 독일어로 쓰긴 했지만, 사실 원래 낫질 비유를 처음 쓴 건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고, 당연히 원래는 영어 표현(Sickle Cut)이었다.] 만슈타인은 위의 작전안을 자신의 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룬트슈테트]] [[상급대장]]에게 제출했다. 견실하고 신중한 지휘관이었던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의 기획안을 그렇게 지지하지 않았으나, 실현 가능성 자체는 동의하여 이를 국방군 총참모부에 보고했다. 여담으로 사실 만슈타인은 원래 그의 능력 및 [[독일 국방군]] 내부의 연공서열로 볼 때, 사실은 차기 [[육군참모총장]]이 돼야 할 인물이었다.[* 당시 독일군 편제상 참모총장이 해당 군의 최고 수뇌는 아니었다. 육군총사령관이 있었고 그 밑에 4개의 국과 육군참모본부가 편성되어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은 그중 참모본부의 수뇌.] 그러나 1938년의 인사 파동으로 그 기회를 놓쳐 일선 [[집단군]] 참모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 룬트슈테트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은 만슈타인이 능력에 비해 보잘 것 없는 한직에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원래 만슈타인의 직전 보직은 육군참모본부 1부장이는데, 서열상 다음 참모총장이 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좌천된 것에는 사료별로 그 이유를 다르게 설명한다. 만슈타인 회고록에서 만슈타인 본인은 [[베르너 폰 프리치]]가 숙청된 후 그와의 친분 때문에 좌천되었다고 설명하며, 만슈타인 평전에서는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루트비히 베크]]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베크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그의 최후]]에서 보듯 나치를 굉장히 싫어하던 인물이었는데, 친나치 군인이었던 만슈타인 또한 싫어했다고 한다.] 이것이 당시 만슈타인이 세운 개념안 수준의 계획을 참모본부에 보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든 게 [[프란츠 할더]]였다. 하지만 신중한 할더는 합리적이고 정교한 계획을 선호하는 데다 작전이 안 풀리거나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게 취미인 그의 눈에 도박이나 마찬가지에 비합리적인 작전 계획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특히 만슈타인의 계획에는 결정적인 결점이 두 개 있었다. 이는 [[기동전]]이 가지는 본질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1. A집단군의 원래 임무는 [[마지노 선]] 방면에서 독일군의 측면을 찌르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저지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작전안의 주공은 자칫하면 측면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기동부대의 기동이 빠르면 빠를수록 보호해야 할 측면이 점점 넓어지는데, 과연 이 '''넓어지는 측면을 제때 보호 가능하도록 병력을 전개할 기동력이 있는가? 아니, 아예 거기에 가져다 쓸 병력이 있기나 한가?''' 1. 더구나 작전술적 차원, 즉 연속적인 [[군단]]급 전투를 기획할 수 있는 [[야전군]] 사령부급의 기갑부대 운용은 아직까지 경험이 없거니와 심지어 이론적 토대조차 다져져 있지 않은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이다. 그와 같은 '''완전 미지수의 [[작전술]] 제대를 별안간 편성하고, 더구나 그들에게 국가의 명운이 달린 주공을 맡긴다는 것은 지나친 도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만슈타인도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었고, 특히 2번 문제에 있어서는 독일 기갑 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이론적 기반을 다져 나가는 중이었다. 또한 1번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만슈타인답게 정말 골 때리는 해결안을 내놓는다. 바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또 쪼개서 ''''남쪽에서 적이 반격을 하기 전에 그쪽을 주공이라고 착각하도록 제대로 한 방 치고, 적이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반격으로 집중하려는 시점에 적의 북쪽 주력을 섬멸한 기동부대가 서둘러 남하해서 그놈들을 또 측면에서 포위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첫 번째 작전을 그대로 한 번 더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기 전에 만슈타인은 38군단의 군단장으로 전출, 사실상 모가지당한다.[* 참모장에서 군단장이니 형식상으로는 승진이지만, 38군단은 서부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프로이센에 있었고 막 편성 중인 신설 부대인지라 보직에서 해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참모본부의 계획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런 비상식적인 계획을 일개 집단군 사령부의 사령관도 아니고 [[참모장]]이 제출했으며, 덤으로 원래 조공부대였던 [[집단군]]을 주공 부대로 둔갑시키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화려한 전공을 탐내는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었다. 여기에 만슈타인과 참모총장 할더는 군부 내의 파벌에서 서로 반대 파벌에 속했으므로, 파벌 단위의 경쟁심리 역시 동시에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슈타인은 지난 [[폴란드 침공]] 당시의 공훈을 명분으로 전출된다.[* 여담으로 이 직전 만슈타인의 어느 참모장교가 38군단 예하의 사단참모로 전출되는 것을 보고 만슈타인이 해당 장교에게 "앞으로 큰 싸움이 있을 텐데 후방으로 가면 공훈은 언제 세우나?"하고 농 섞인 위로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며칠 뒤에 자신이 바로 그 군단의 군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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